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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캐나다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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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캐나다 관계
캐나다 및 일본의 위치

캐나다

일본

일본-캐나다 관계는 여러 분야에서 우호적이다. 양국 간 공식적인 외교 관계는 1928년 일본이 오타와에 영사관을 개설하면서 시작되었다. 1929년에는 캐나다가 도쿄도에 공사관을 설치했으며, 이는 캐나다가 아시아에 설치한 첫 외교 공관이었다.[1] 같은 해 일본 역시 오타와의 영사관을 공사관으로 승격하였다.[2]

1929년에 설립된 캐나다의 일본 공관은 캐나다가 아시아에 설치한 가장 오래된 외교 공관이며, 미국과 프랑스에 이어 영연방 국가가 아닌 지역에 설치된 세 번째로 오래된 공관이다. 현재 캐나다는 도쿄도에 대사관을 두고 있으며 나고야시에 영사관을 운영하고 있다. 일본은 오타와에 대사관을 두고 있으며 캘거리, 몬트리올, 토론토, 밴쿠버에 네 개의 총영사관을 두고 있다.

2017년 BBC 월드 서비스 여론조사에 따르면 캐나다인의 77%가 일본의 영향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12%는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로 인해 캐나다는 세계에서 가장 친일적인 국가 중 하나로 평가된다.[3]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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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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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캐나다가 상설 공사관을 상호 설치하기 이전에도 양국 간에는 이미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캐나다에 정착한 최초의 일본인 이민자로 알려진 나가노 만조는 1877년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뉴웨스트민스터에 도착하였다.[4]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 활동한 여러 캐나다인 선교사들은 일본 기독교 교회의 발전과 교육 제도의 근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게이오기주쿠 대학의 후쿠자와 유키치와 가까운 관계를 맺었던 알렉산더 크로프트 쇼(Alexander Croft Shaw) 목사, 도시샤 대학 설립에 기여한 G. G. 코크런(G. G. Cochran), 그리고 아오야마가쿠인 대학 설립에 기여한 데이비드슨 맥도널드(Davidson Macdonald) 박사가 있다.[2]

1887년에는 요코하마와 밴쿠버를 잇는 증기선 항로가 개설되었으며,[4] 캐나다 태평양 철도의 해운 부문 선박들이 이 항로를 정기적으로 운항하였다.[5] 이들 선박 가운데 하나였던 RMS 오스트레일리아 황후와 선장 새뮤얼 로빈슨은 1923년 간토 대지진 당시 구조 활동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6]

1904년부터 1905년까지 캐나다 왕립야전포병대 소속 허버트 시릴 새커는 러일 전쟁 기간 일본군의 군사 참관장교로 활동하였다.[7] 그는 러일 전쟁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서보장 3등급을 수훈하였으며,[8] 러일 전쟁 종군기장도 함께 수여받았다.[7]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은 대영 제국의 동맹국이었다. 일본 해군은 북아메리카 특무전대를 파견하여 북미 연안에서 호송 및 경계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이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브리티시컬럼비아주 스탠리 공원에 세워져 있다.

공관 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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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는 1929년 도쿄도에 공사관을 개설하였다. 이는 워싱턴 D.C.와 파리에 이어 영연방 국가 이외 지역에 설치한 세 번째 공관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캐나다가 일본을 아시아 외교 활동의 핵심 거점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겼음을 보여준다.[2] 그러나 공사관 설치의 배경에는 20세기 전반 브리티시컬럼비아주에서 확산된 반아시아 정서도 크게 작용하였다. 캐나다의 총리 윌리엄 라이언 매켄지 킹은 일본인의 캐나다 이민을 제한하고자 하였으며, "일본인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일본에 우리 공사를 두고 여권에 비자를 발급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9] 참고로 일본은 오타와에 공사관을 설치하기 40년 전인 1889년에 이미 밴쿠버에 영사관을 설치하였다.

초대 주캐나다 일본 공사는 도쿠가와 이에마사로, 1929년부터 1934년까지 재임하였다. 초대 주일 캐나다 공사는 허버트 말러 경으로, 1929년부터 1936년까지 재임하였다.[10]

제2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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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티시컬럼비아주의 일본계 캐나다인 강제수용 수용소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1941년 양국의 외교 관계는 단절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 캐나다는 전시조치법(War Measures Act)에 근거하여 국가 안보를 이유로 일본계 캐나다인들을 강제 수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계 캐나다인들은 원하는 직업에 종사할 권리와 재산을 소유할 권리 등 여러 시민권을 박탈당하였다.

1941년 12월,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지 8시간 뒤, 일본군과 교전 중이던 영연방군은 홍콩 전투에 투입된 캐나다군의 여단급 부대인 C 포스를 포함하고 있었다. 홍콩이 수 주 만에 함락되면서 수백 명의 캐나다군 장병이 전쟁포로가 되었다.

알래스카주에서는 알류샨 열도 전역 중 일부 섬이 일본군에게 점령되었다. 1943년 8월 15일 미군 2만 9천 명과 캐나다군 5천 명은 코티지 작전의 일환으로 키스카섬에 상륙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미 2주 전에 철수한 상태였기 때문에 섬은 무인도였다. 또한 캐나다 왕립공군 소속 전투기 비행대 두 개가 알류샨 열도 상공에서 작전에 참가하여 일본 항공기 1대를 격추한 전과를 올렸다. 캐나다 왕립해군의 무장 상선순양함 4척과 초계함 2척도 알류샨 열도 작전에 참가하였으나 적 함대와 교전하지는 않았다.

1944년부터 1945년까지 캐나다 왕립해군 함정 4척이 영국 태평양 함대(BPF)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또한 함대항공대 소속 항공요원을 비롯한 다수의 캐나다인이 영국 해군 함정에서 복무하였다. 특히 순양함 HMCS 우간다는 트럭 환초의 일본군 주요 기지를 공격한 인메이트 작전에 참가하였으며, 이후 영국 태평양 함대는 일본 본토에 대한 공습 작전에 참여하였다.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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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S 미주리 함상에서 캐나다 대표로 일본의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로런스 무어 코스그레이브 대령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와 일본의 연합국에 대한 무조건 항복 이후인 1946년, 캐나다 대표단은 도쿄로 복귀하였다. 일본도 장래의 외교 관계 정상화를 준비하기 위해 1951년 오타와에 외교 사무소를 설치하였다. 양국의 외교 관계는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발효와 함께 완전히 회복되었다.[10]

도쿄의 캐나다 공사관은 대사관으로 승격되었으며, 로버트 웰링턴 메이휴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초대 주일 캐나다 대사로 임명되었다. 일본 역시 오타와에 대사관을 설치하였으며, 이구치 사다오가 초대 주캐나다 일본 대사로 부임하였다.[10]

캐나다는 일본의 국제사회 복귀를 지원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1954년 오타와에서 열린 콜롬보 계획 회의에서 일본의 가입은 캐나다의 제안으로 이루어졌으며, 같은 해 양국은 통상협정을 체결하였다. 또한 캐나다는 일본의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가입을 지지하였고, 일본이 GATT에 가입했을 때 최혜국 대우를 부여한 소수 국가 가운데 하나였다.[2]

캐나다는 1956년 일본의 국제 연합 가입을 추천하고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또한 1963년 일본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과정에서도 강력한 지지를 보냈다.[2]

관계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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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캐나다의 관계 회복을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53년 아키히토 친왕(훗날 천황, 재위 1989년~2019년)의 캐나다 방문이었다. 이듬해에는 캐나다의 총리 루이 생로랑과 일본의 내각총리대신 요시다 시게루가 상호 방문하였다.[10]

1950년대 이후 일본과 캐나다는 어업, 무역, 항공, 우편, 원자력,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양자 협정을 체결하였다. 또한 양국 총리의 상호 방문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1960년대 이후 일본에서는 기시 노부스케, 이케다 하야토, 다나카 가쿠에이, 오히라 마사요시, 스즈키 젠코, 나카소네 야스히로, 다케시타 노보루, 가이후 도시키, 무라야마 도미이치, 하시모토 류타로, 오부치 게이조, 모리 요시로,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캐나다를 방문하였다. 캐나다에서는 존 디펜베이커, 피에르 트뤼도, 조 클라크, 브라이언 멀로니, 킴 캠벨, 장 크레티앵, 폴 마틴 총리가 일본을 방문하였다.[10]

이 시기에 브라이언 멀로니 총리는 캐나다 하원에서 일본계 캐나다인이 제2차 세계 대전 중 부당한 대우를 받은 데 대해 공식 사과하였다. 이에 따라 1988년 멀로니 총리와 일본계 캐나다인 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Japanese Canadians) 회장 아트 미키는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한 보상 협정(Redress Agreement)에 서명하였다.[10]

2008년 캐나다 총리 스티븐 하퍼는 도쿄 황궁에서 접견을 받았으며, 이는 캐나다와 일본의 공식 외교 관계 수립 8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였다. 2009년 7월에는 아키히토 천황과 미치코 황후가 처음으로 캐나다를 국빈 방문하였다.[11]

2011년 3월 2011년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과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발생하여 도호쿠 지방, 간토 지방, 주부 지방과 도쿄 등이 피해를 입고 대규모 정전이 발생하자, 캐나다 총리 스티븐 하퍼는 일본 국민과 간 나오토 총리에게 애도의 뜻을 담은 조전을 보냈다.

2012년 3월 26일, 스티븐 하퍼 총리는 일본 센다이시의 피해 지역을 방문하였다.

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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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캐나다 이주는 1800년대에 시작되었으며, 세기가 바뀔 무렵 제한 조치가 시행되기 전까지 상당히 활발했다. 밴쿠버의 재팬타운은 한때 일본계 캐나다인의 중심지였으나, 최근 몇 년 동안 일본인 공동체는 더 이상 이 지역에 기반을 두지 않고 있다.

같이 보기

[편집]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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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Ambassade du Japon au Canada: 80ième anniversaire des relations diplomatiques nippo-canadiennes. 보관됨 2008-05-01 - 웨이백 머신
  2. 1 2 3 4 5 Foreign Ministry of Japan: Episodes in Japan-Canada Relations.
  3. ↑ “2017 BBC World Service poll” (PDF). BBC World Service. 2017년 7월 4일. 20쪽. 2017년 7월 30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4. 1 2 Ambassade du Japon au Canada: 80 années d'histoire, Contact initial'. 보관됨 2008-06-12 - 웨이백 머신
  5. ↑ Musk, George. (1981). Canadian Pacific: The Story of the Famous Shipping Line, p. 5.
  6. ↑ "Capt. Samuel Robinson, Who Won Fame For Rescue Work in Jap Quake, Dies," New York Times. September 7, 1958.
  7. 1 2 _____. (1922). Prominent People of the Maritime Provinces, p. 193.
  8. ↑ “Articles L'ORDRE DU TRÉSOR SACRÉ (JAPON) – 88 autres titulaires, Jean-Marie Thiébaud”.
  9. ↑ Canada, Global Affairs; Canada, Affaires mondiales (2000년 1월 1일). “Global Affairs Canada”. 2018년 8월 2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8월 25일에 확인함.
  10. 1 2 3 4 5 6 Embassy of Japan in Canada: 80 Year History 보관됨 2009-12-06 - 웨이백 머신
  11. ↑ Nishida, Tsuneo. "Toyako Summit identified a range of global challenges," The Gazette (Montreal). August 4, 2008.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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